미술관에 가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미술관에 가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조용하고 모던한 느낌이 마음을 차분하면서도 산뜻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미술에 관한 지식은 적지만 인사동 화랑이나 도서관의 소박한 전시회에는 종종 가곤 한다. 무료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지난 학기에는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린 「모네에서 피카소까지」에 갔었다. 성균관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는 손군이 동행해 주었는데, 서로 평소 읽어두었던 작가의 일화(이를테면 고흐와 고갱의 일화나 모네의 녹내장 병력과 작품과의 관계 같은 것)나 작품에 대한 의견을 나눌 수 있어 무척 즐겁게 감상했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는 아쉽게도 시간이 맞지 않아 동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혼자서 전시회에 가는 것도 작품에 집중할 수 있어 즐거웠다. 작품 속에 남아있는 작가의 숨결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좀 더 차분하게. 명상하듯이. 가브리엘 포레의 《시칠리안느》와 에릭사티의 《짐노페디》를 아주 조용하게 들으면서.

 

 

ⓒ 주행연 (구글검색)

 

 국립현대미술관 가는 길에서... 조각과 아이들을 만나다.

 

  내가 미술에 대해 좀 알지, 라고 말할 수준은 아니어서 어떤 전시회에 가야 할 지 막막했었다. 알고 있는 서양 작가들의 미술전은 대부분 상반기에 모두 열렸고, 이번 가을에는 주로 한국 작가들의 미술전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 고민한 끝에 국립현대미술관의 「컬렉션, 미술관을 말하다」에 가기로 했다. 무엇보다 한국 회화의 두 거장, 이중섭 화백과 박수근 화백의 그림이 전시된다는 것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한국 회화에 까막눈으로 살아온 터라 낯익은 이름에 반가웠던 것이 사실이다.

 

  과천 대공원역에 도착하여 제법 걸으니 국립현대미술관 가는 언덕길에 조각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갓 잘라낸 풀내음 맡으며, 조각을 하나 하나 감상해 보았다.

  최기원님의 「위대한 탄생」은 가운데 구(球)를 중심으로 양쪽에 기둥이 대칭적으로 놓여있어 비례감과 균형성을 통해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양 기둥의 화려한 조각은 탄생의 핵심인 듯한 구(球)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김찬식님의 「정(情)」은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 중 하나였으나, 최기원님의「위대한 탄생」과 비교하면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아보았다. '탄생'이라는 단어와 '정(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따뜻함'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연상을 계속해 보니 '따뜻함'의 대표적인 예로 '태양'을 생각할 수 있었다. '태양'의 구조는 구(球) 형식을 띠고 있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치자, 왜 두 작품에 공통적으로 구(球)가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김윤화님의 「영겁회귀 '90」은 마치 일그러진 뫼비우스 띠처럼 시작과 끝이 맞물려 서로를 구분하기 어렵게 표현되어 있어 제목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덩어리 진 모습에서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고 '영겁회귀'라는 주제의 무거움, 무한성을 느낄 수 있었다.

 

  제법 시간을 들여 조각들 사이를 걷고 있는데, 먼 곳에서 부터 '와~'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엇, 인디언 공연을 하나'하고 생각하고 있자니, 소리가 점점 커져왔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노란 옷을 입은 유치원생들. 아이들은 한 조각상 앞으로 달려갔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구(球)를 네 명의 청동상이 밀고 있는 「각축의 인생」이었다. 아이들 모두 선생님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사진에 나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작품은 미술관 정문 앞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장소로 보아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한 작가의 의도를 볼 수 있었다. 작가와 관람객이 작품을 통해 서로 호흡할 수 있는 좋은 사례였다.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 바람직한 소통의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